이게 철이 들어서, 철이 들어서...
본문


12.21
Saturday 23:17
시인 박목월 선생님의 아들 박동규 교수님의 '내 생애 가장 따뜻한 날들'의 한 부분입니다. 오래 기억하고 싶어 옮겨 적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이 무엇을 사 달라고 하면 크리스마스에 보자고 하셨습니다. 다섯 형제들이 사 달라고 하는 것을 다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이던 동규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반 아이들 대부분이 구두를 신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는 구두를 사 달라고 졸라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저녁, 아버지는 다섯 남매들을 불러 앉혔습니다. 노트와 연필을 들고 막내부터 “무엇을 사 줄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막내는 썰매를 사 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동생 차례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여동생은 벌떡 일어서더니 “아버지, 털 오버 사 주세요!” 하였습니다. 순간 형제들 모두가 놀랐습니다.
아버지 얼굴이 하얗게 변했고 손에 든 연필과 노트가 떨렸습니다. 고개 숙인 아버지는 한참 후 “그래, 사 줄게. 그런데 아버지가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준비가 되지 않았어. 겨울이 가기 전에 꼭 입혀 줄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 아버지는 소년 동규에게 물으셨습니다. 그의 눈앞에는 연필과 노트를 들고 떨고 있는 아버지 모습만 보였지 구두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심결에 “털장갑이요.”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다시 한 번 물으셨습니다. “털장갑?” “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밤이 되어 전등을 끄고 이불 속에 들어갔습니다. 거품처럼 사라진 구두 생각에 쓸데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 방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소년 동규의 눈물을 닦아 주며 “이게 철이 들어서, 철이 들어서….” 하면서 우셨습니다.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